허련은 조선 말기를 대표하는 남종화가 중의 한 사람으로 자가 마힐(摩詰), 호는 소치(小痴) 혹은 노치(老痴)라 하였고 초명은 유(維)이다. 허련은 32세 되던 해 초의선사(艸衣禪師, 1786-1866)를 통해 소개받은 김정희(金正喜)로부터 남종화의 필법과 정신을 배워 개성 있는 회화세계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김정희로부터 “압록강 이동해 소치를 따를 자 없다”는 높은 평가를 받았을 만큼 허련은 속기가 없는 문인적 일기(逸氣)를 개성적 필치로 표출하였다. 그의 화풍은 아들 허형(許瀅), 손자 허건(許楗), 방계의 허백련(許百楗)으로 이어지는 근현대 호남 화단의 기틀을 마련한 셈이 되었다. 허련은 김정희를 만나기 전까지 <공재서첩(恭齋書帖)>과 <고씨서보(顧氏書譜)>, <개자원서보(芥子園書譜)> 등을 연습하였는데, 이 그림은 <고씨화보>에 있는 문가(文嘉) 산수화의 구도와 필법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근경의 토파(土坡)와 키가 서로 다른 세 그루의 나무, 나룻배에서 낚시대를 드리운 어부, 탁 트인 넓은 수면, 길게 난 토파와 야산, 그 사이를 감돌고 있는 연운(煙雲) 등을 <고씨화보>의 그림과 비교해 보면 각 경물의 위치와 형태가 거의 동일하다. 이 그림이 문가의 산수화를 방한 것이라는 사실은 “문가(文嘉)는 그림을 잘 그렸다. 예찬의 기운을 방하였으나 간일하고 아취가 있는 것은 예찬에 미치지 못한다.(文文水畵善 住倪雲林氣韻 簡雅自不可及)”는 자제(自題)에도 밝혀져 있다. 문가가 예찬을 따랐지만 예찬을 능가할 수 없다는 말로 예찬을 높이 칭송하고 있다. 실제로 허유는 이런 예찬식의 구도를 기본으로 약간의 변형을 가한 구성을 매우 즐겨 사용하였다. 말년에는 수필(秀筆)과 갈필(渴筆)을 구사하며 독자적인 화풍을 이룩하였으나 이 그림에 그러한 면모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주문방인 “소치(小癡)”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