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두서(尹斗緖)(1668-1715)는 조선 후기의 선비화가로 본관은 해남, 자는 효언(孝彦), 호는 공재(恭齋)또는 종애(鍾崖)이다. 증조부인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이래로 해남 윤씨 집안은 기호남인 학파에 속하게 되었다. 당시 정계는 서인계 노론일파에 의하여 주도되었고 당쟁이 심하였으므로 윤두서는 1693년(숙종19)에 진사에 급제하였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평생 학문과 서화에 전념하였다. 그는 서울의 연화방(현재 명동)에 살면서 성호 이익(星湖 李瀷)의 형인 이서(李漵)와 평생지기로 교유하였고, 심득경(沈得經), 이하곤(李夏坤), 이만부(李萬敷), 이형상(李衡祥), 이사량(李師亮), 민룡현(閔龍顯) 등과 교분을 가지며 학문과 예술에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그는 매우 학구적인 사람으로 평생 교유를 즐거워 하지 않고 칩거하며 학문에 힘썼는데, 정통 성리학 이외에도 천문학, 기하학, 병법, 의학, 음양, 지리, 점서, 서화, 전각, 음악에 이르기까지 윤선도 이래 가풍이 된 박학을 추구하되 반드시 정확히 연구하고 조사하여 그 뜻을 파악하고 스스로 몸에 체득하는 실학(實學)을 추구하였다. 또한 당시 금기시되었던 패관소설까지 읽었을 정도로 진취적인 성향을 가졌다. 이러한 학구적인 면모와 진취성은 서화 방면에도 뚜렷이 반영되었다. 그는 김명국, 이징 등 화원화가들에 힘입어 원체화풍이 풍미하였던 당시 화단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문인화의 정통성과 화격을 정립시키고자 노력하였으며, 서양문물을 비롯한 새로운 문물과 문예사조를 토대로 서화에 있어서도 새로운 방법론과 양식을 추구하였다.
윤두서는 산수화와 고사인물화, 말그림을 특히 잘 그렸고, 자화상과 풍속화, 정물화 등 새로운 성격의 그림을 시도하는 등 여러 방면의 회화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였다. 그의 그림 중 산수화와 고사인물화는 수묵의 균형된 운용을 중시하며 문인적인 담박한 화법을 창출하는데 기여하였고, 말그림에서는 사생을 중시하여 사실적이면서 기운생동 하는 표현을 낳았다. 사실과 객관적인 묘사를 중시하는 그의 독특한 회화관은 자화상과 정물화같이 서양화법의 실험적인 수용을 반영하는 그림을 제작하게 하였으며, 현실을 중시하는 실학적 성향은 새로운 화제로서 풍속화로 귀결되었다. 이처럼 그는 다양한 새로운 시도를 통하여 조선 후기 화단에 새로운 경향을 주도하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그의 문집인 <기졸(記拙)> 중에 실린 <화평(畵評)>은 비록 짧기는 하지만 이제까지 알려진 회화관계 기록 중 가장 체계적인 회화론으로 평가된다. 글씨에 있어서도 그는 평생지기인 옥동 이서와 함께 동국진체(東國晋體)라고 일컬어지는, 중국 육조시대의 대가인 왕희지(王羲之)의 서체를 근본으로 한 새로운 서체를 제시하여 조선 후기 화단(書壇)에 큰 변화를 초래하는데 기여하였다. 그는 여기화가로서 자처하였기 때문에 그림을 많이 제작하지 않았고 여러 사람에게 그림을 주지 않아 전하는 작품이 흔치 않지만, 18세기 전반 경 한때는 정선보다 더 이름이 높았으며, 19세기에 들어와 사의적인 문인화풍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다시 한번 문인화의 종장으로 평가되었다.
〈수하한일도〉는 오래된 고목(古木) 아래서 편안히 여가를 즐기는 어옹(漁翁)을 표현하였는데, 그 구도는 일종의 이단 구도로서 조선 중기적인 구도의 잔영이 느껴지며 동시에 그가 방작한 적이 있었던 예찬계의 이단 구도를 변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범한 구성과 함께 담박하면서도 메마른 듯한 먹색과 유려하면서도 꾸밈새가 없는 편안한 필묘, 은근하게 베풀어진 먹색 섞인 담채선염의 효과 등 문인화의 묘미가 잘 표현된 작품이다. ‘윤효언작(尹孝彦作)’이라는 관서와 ‘공재(恭齋)’라고 전서체로 새겨진 주문방인이 있다. 화면 왼쪽에 쓰여진 화제는 문인화가인 윤제홍(尹濟弘)(1764-1840이후)이 쓴 것인데 고법이 근체보다 낫다고 하였으며, 윤두서의 그림을 고법이 잘 표현된 작품으로 평가하였다. 화면의 바깥쪽 흰 윤곽에는 오세창(吳世昌, 1865-1953)이 관서하고 ‘세창(世昌)’이란 백문방인과 ‘위창(韋昌)’이란 주문방인을 찍어 그의 소장품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역시 오세창이 ‘윤제홍제(尹濟弘題)’라고 써 두어서 이 그림이 후배화가나 수장가들에게 높게 평가된 것을 시사하고 있다. “아동서화지성직수백년, 연달달유고법승근체, 약차폭역자 윤경도서 我東書畵之盛直數百年, 然達達有古法勝近體, 若此幅亦自好 尹景道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