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식은 초명(初名) 욱상(昱相), 호는 심전(心田), 불부옹(不不翁) (만년에 씀)으로 그림의 각체(各體)에 모두 능했고 예서, 행서도 잘 썼다. 그는 조석진(趙錫晉)과 함께 조선 말기 서단(畵壇)의 쌍벽으로서 말기화단과 근대화단의 교량 역할을 한 인물이다. 조석진과 함께 일찍이 오원(吾園) 장승업( 張承業)을 사사(師事)하여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02년에는 어진도사도감(御眞圖寫都監)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활동 중 가장 중요한 것은 1918년 일제(日帝)의 기만적 문화정책에 대응해 조직된 서화협회(書畵協會)의 초대회장(初代會長)을 맡아 민족고유의 서화를 진작시키고자 노력한 것이다. 그 때문에 삼일운동 후에 옥고(獄苦)를 치르고 후유증으로 59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산수(山水)를 가장 많이 그렸으나 영모(翎毛), 인물 등도 많이 남겼다. 이 신선도 6첩 병풍은 유해희섬(劉海戱蟾), 장과로(張果老), 적송자(赤松子), 안기생(安期生) 등으로 이루어졌는데, 그의 인물화풍의 특징을 잘 보여줄 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장승업의 영향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다. 즉 인물들의 가늘고 긴 눈매와 두드러진 광대뼈, 그리고 수염을 길게 드리운 노인들의 모습은 앞에서 보았던 장승업의 〈선인채지도〉의 인물과 상통한다. 또 복잡하고 꺾임이 심한 의습선, 소나무의 뒤틀린 모습과 밤송이 같은 잎 등도 장승업의 특징이다. 그러나 도식적으로 처리된 구름이나 산준법에서는 장승업 양식의 매너리즘화도 진행되었음을 볼 수 있다. 한편 유해희섬(劉海戱蟾)은 거의 동일한 도상의 작품이 서울대박물관에도 소장되어 있고, 동료 조석진도 인물의 방향만 바뀌었을 뿐 흡사한 작품을 남겼다. 유해희섬은 심사정, 백은배 등 조선 후기 이래 여러 화가들이 그렸던 소재이다. 또 장과로도기(張果老倒騎)의 소재도 많은 화가들이 그렸고, 특히 김홍도의 걸작이 간송미술관에 전한다.